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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권

최대 가용 자원의 불가용성
사회권규약 제2조제1항은 “이 규약의 각 당사국은 특히 입법조치의 채택을 포함한 모든 적절한 수단에 의하여 이 규약에서 인정된 권리의 완전한 실현을 점진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개별적으로 또한 특히 경제적, 기술적인 국제지원과 국제협력을 통하여 자국의 가용 자원이 허용하는 최대한도까지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강조하여 덧붙임).

“점진적인 실현”이란 개념은 국제 인권 협약하에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와 관련한 국가의 의무 중 중심적인 측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핵심은 국가가 가용 자원을 극대화하여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이다. “가용 자원”에 대한 언급은 이런 권리의 실현이 자원의 부족에 의해 지장을 받을 수 있으며 어느 정도 기간이 흘러야 성취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국가가 적절한 수단을 취해야 할 의무에 부응하는 것은 재정적 및 기타 방식으로 국가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 비추어서 평가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점진적 실현의 개념은 국가가 충분한 자원을 갖추기 전까지는 이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협약은 경제적·사회적·권리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즉각적인 의무를 부과한다. 자원이 없다고 해서 이런 권리를 이행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무한정 연장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과 상관 없이 한 국가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최소 수준의 권리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하며, 가난하고 주변화되어 있으며 불이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보장해주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해야 한다. 국가는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긴요한 경제적 및 사회적 수요에 우선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기아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복지를 보장하지 못한 것을 자원의 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정당화할 수 없다.

수집된 증언에 기초하여 위원회는 북한의 자원 분배가 특히 대규모 기근 시기에 기아 및 만성 영양실조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목표를 우선시하는데 크게 실패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북한은 북한 주민 다수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구매에도, 자국에서 식량에의 접근성과 가용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농업, 인프라구조, 기타 방법들에 대한 투자에도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FAO와 WFP가 지속적으로 하루 일 인당 573g의 곡물에 해당되는 북한 당국의 공식 목표를 어느 시기에도 달성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식량 가용성 문제뿐 아니라 저장, 운송 및 상품 유통 과정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공급 사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위원회가 수집한 증언 및 기타 정보들은 북한이 군사, 최고지도자 개인 숭배, 그와 관련된 우상화 행사, 엘리트들의 사치품 구매 등에 불균형적인 양의 자원을 계속 할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 군사비의 최우선적 지출

북한의 상비군은 12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이것은 전체 인구 대비로 보면 세계에서 군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이다. 이 국가의 비밀스러운 성격으로 볼 때 실제로 군사비를 어느 정도 지출하는지 그 숫자를 입수하기는 어렵다. 공식적 자료는 전체 국가 예산의 16%가 국방에 할당된다고 한다. 다른 자료들은 군사비가 국민총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1990년대 말 기근을 겪는 동안 자원을 시급한 수요에 할당하는 대신, 김정일은 “선군(Military First)” 정책에 맞추어 더욱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중앙방송의 공식 방송은 이 정책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역사에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위대한 김정일 수령동지는 인민의 운명과 혁명의 미래가 총대에 달려 있다고, 오직 군대에 의존할 때만이 우리가 역경을 헤치고 나아가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굳게 믿으셨습니다 … 총대가 약해지면 아무리 경제가 막강해도,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외부 세력이 나라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2003년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 발표된 논설도 비슷한 논지를 전개한다. 

군대와 경제의 상관 관계에서 우선적 위치를 점하는 것은 역시 군대이다 … 경제력이 군사력에 기초한 것이라면 군사력은 경제력을 보장해주는 것이며 또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강한 군사력이 없다면 국가 산업을 수호할 수 없을 것이며 평화로운 경제 환경을 보장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막강하고 자족적인 국방 산업을 위한 기초를 놓아야만이, 우리는 경공업 및 농업을 비롯한 모든 경제 분야를 활성화시킬 것이며 인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조사위원회에 제출된 전문가 분석에 의하면 군사비 지출의 일부만이라도 식량 구매 비용으로 돌렸다면 북한 주민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경제학자 마커스 놀랜드(Marcus Nolan)는 최근의 AO/WFP 작물 평가에 기초한 분석에서 밝혀진 것만으로도 4만 톤의 곡물 부족을 겪었다고 한다. 2013년 9월 IMF에 의하면 쌀 가격은 1톤 당 약 470달러, 옥수수는 1톤 당 약 207달러라고 한다. 유엔 자료에 근거해서 놀랜드는 2011년 북한 경제의 규모를 124억 달러로 추산한다. 따라서 곡물 부족액을 메꾸기 위해서는 오직 국가 수입의 0.02%만 있으면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 수입의 25%가 군사비로 쓰이고 있다는 추산이 맞는다면, 곡물 부족은 군사비를 1% 이내만 줄여도 막을 수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마커스 놀랜드는 또한 대규모 기근 절정기에서도 곡물 부족을 메우는 데 필요한 돈은 겨우 1억에서 2억 달러였다고 한다. 이는 재화와 용역 수출 예산의 5~20%, 혹은 현재 북한 당국 수입의 1~2%에 지나지 않는다. 워싱턴 공청회에서 놀랜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1990년 기근 기간 동안] 필요했던 곡식의 양은 훨씬 많았지만, 1990년대의 곡식 값은 지금보다 훨씬 쌌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데이터를 분석하느냐에 따라, 기근 절정기에도 1억이나 2억 달러 정도만 곡식을 구입했어도 부족분을 메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기근 시기 동안에도 북한 당국은 마음만 먹었다면 곡식을 수입해서 재앙을 피할 만큼의 자원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군장비를 구입하는 것을 연기하고 국제시장에서 식량을 구매하는데 외화를 사용하기만 했어도 많은 숫자의 사람을 구했을 것이다. 1994년 북한 당국이 식량 부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때도 북한은 잠수함 몇 대를 구입한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1999년, 북한 당국은 상업적인 곡식 수입을 20만 톤 이하로 줄이면서도, 벨라루스로부터 40대의 MiG-29 제트 전투기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8대의 군 사용 헬리콥터를 구입하는데 외화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유엔 사무총장은 북한 당국이 군사/방위비 지출을 줄이고 자원의 공평한 재분배를 확보함으로 식량 위기 및 기타 개발이 필요한 영역에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조사위원회는 북한이 인도주의적 관심사보다 군대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바꾸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현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선군” 정책은 여전히 북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2012년 4월 15일 당 제1비서, 즉 최고지도자로서 행한 첫 번째 연설에서 김정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선군 조선의 영광을 영원히 기리고 강력한 사회주의국가라는 이념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도, 모든 면에서 인민군을 강화해야 한다.”

201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 예산에 대한 보고를 할 때, 재정상 최광진은 오직 “전체 예산의 38.9%만 사회주의하에서 보편적인 무상 의무 교육 시스템, 무상 건강 관리, 사회 보장, 사회 안전, 재활, 휴식 및 문예 발전과 스포츠 능력 증진 같은 사회 문화를 위한 대중적 정책들과 조치들을 집행하는 데 쓰였다”고 말하였다. 최광진의 보고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야에 더 많은 예산이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 “국가 예산의 일부는 국방으로 가고 있다”고 어렴풋이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2) 식량 관련 국가 예산을 절감하기 위한 원조 이용

북한은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다. 처음에는 그런 원조를 북한 체제의 실패를 승인하는 것이며 외국의 간섭이 들어오는 시점으로 간주하였다. 북한 식량 피해 복구 위원회 위원장 리종화는 북한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순전한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치적 목적이 있는 식량지원은 당국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며, 경제 및 정치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기 때문에 북한은 어떠한 식량 지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1997년 김정일은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은 하나를 주고 열이나 심지어 백까지 빼앗아가려는 약탈과 복속의 올가미”라고 말하였다. 2000년 노동신문은 인도주의적 지원에 대한 북한의 공식 입장을 보도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은 공격의 도구이다 … 번영이 아니라 가난, 기근, 죽음을 가져오는 위험한 독이다.”

하지만 북한은 자기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원을 사용하였다. 북한은 지원 활동의 조건 여부와 북한 내로 들어오는 국제적 활동가의 수를 인도주의 단체가 협상 테이블로 가져오는 돈의 액수와 연계시켰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이 국제적 지원을 가장 취약한 주민들의 굶주림과 아사를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국제 수지 적자를 메우는 데 썼다는 점인데, 이는 통계 수치로 알 수 있다. 북한은 지원이 들어오자 그만큼 더 식량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상업적 수입 대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마커스 놀랜드가 워싱턴 공청회에서 제시한 다음 그래프(그림 12)는 북한에 대한 지원이 증가함에 따라 북한의 식량 수입은 감소하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의 식량 지원 대비 상업적 식량 수입

다음 그래프(그림 13)는 역시 마커스 놀랜드가 조사위원회에 제출한 것으로, 북한 식량 수입의 변화와 비교하여 전반적 상업적 수입의 변화를 보여준다. 북한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993년과 2010년 사이 식량 수입은 줄고, 다른 상업적 수입은 현저하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물품 및 식량 수입
3) 양자 공여국의 역할

다자간 기구는 북한의 지원 전달에 있어서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1995년 이래 북한에 전달된 전체 식량 지원의 75%가 중국, 한국, 미국, 그리고 일본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국가들이 지원을 제공한 조건은 각각 다르다. 햇볕정책기조하에 한국은 많은 양의 지원을 조건없이 하였다. 미국은 지원을 북핵 관련 사안의 진전과 연계시켰다. 1995년에서 2009년 사이, 미국은 에너지 지원금으로 북한에 6억 달러를 제공하였다. 이 지원은 1995년부터 2003년, 그리고 2007년부터 2009년에, 북한이 플루토늄 추출 핵 시설을 동결한다는 조건으로 주어졌다.

양자 공여국들이 지원을 다루는 방식은 유엔과 기타 인도주의적 기구들에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 중반 중국과 한국이 제공한 무조건적인 지원은 북한으로 하여금 WFP가 정착시키고자 한 몇몇 모니터링 계획들을 거부하게끔 하였다고 참관인들은 말한다. 미 의회조사국(U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CRS)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006년 북한 당국이 WFP의 규모를 줄이고 지원 물자를 분배하고 모니터하기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제약을 부과하자 WFP는 프로그램 규모를 현저히 줄였다. 그 후 WFP와 평양은 WFP가 원래 목표로 했던 지원 대상 규모인 640만 명의 3분의 1도 안 되는 190만 명 분에 해당되는 식량을 제공하기로 교섭하였다. 북한 총 인구는 약 2200만명이다. 이 교섭 이후 북한 주재원의 75%가 삭감되어 10명만 남게 되었으며, 이들 모두 평양에 주재하고 있다. 2006년 이전에는 40명 이상이 북한 6개 지역에 주재하면서 매년 수천 건 이상의 이동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북한은 자국 주재 WFP 직원들에게 한국어 가능자 고용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4) 최고지도자의 이익을 위한 평행 기금(Parallel fund)

1990년대 북한이 겪은 경제적 및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북한 당국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합법적 및 불법적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획득된 외화는 기근 시기 동안 북한 주민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식량, 약품, 기타 물품을 사는 데 쓰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정규 당국의 예산 외에 평행 기금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런 기금은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제도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부서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고지도자 자신, 그 가족,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엘리트 등의 사적 비용 및 기타 공식적 예산에서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최고지도자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다.

관료들로부터 얻은 증언은 북한 당국이 외화를 벌기 위해 다양한 범죄 행위에 관여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범죄 행위로부터 얻은 수익은 2008년에 연간 5억 달러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북한 연간 수출의 3분의 1에 이른다. 정보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해외파견한 노동자 임금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돈의 유형에 해당한다고 한다.

• 한 증언자는 1997년에 조선국제보험회사(KFIC)의 동북아시아 은행에서 자기가 했던 일에 대해 기술하였다. 그는 북한 당국의 두 가지 평행한 예산의 존재를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그는 이것들을 “인민 경제”와 “궁정 경제”(최고지도자에 의해 운영되는것)라 불렀다. 그는 외국 보험 회사에 사기를 쳐서 외화를 버는 일을 맡았다. 이후 이 돈은 “왕실 경제”에 재배치되었다. KFIC에서 생산된 모든 문서들은 외화 벌이가 대부분 김정일의 개인적 “혁명 기금”에 기여하기 위해서 사용됐다는 증거를 제거하기 위해서 파기되었다. 그 증언자 자신이 많은 문서들, 예컨대 회계 기록과 인출 정보 등을 파기했다고 한다.

• 1990년대에 금수산 태양궁전에서 일했던 한 명의 증언자는 조선노동당의 경리부는 김씨 가족이 원하는 것을 생산, 처리,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심지어 그들의 쌀은 독립적으로 생산된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무역회사 중 하나인 능라 이 이 펀드를 위한 재정을 생성한다고 진술하였다.

• 전 보위부 요원은 모든 당국 기관들에게 매년 그들이 벌어야만 하는 외화 할당량이 주어졌다고 진술하였다. “당국은 돈이 어디서 오는지 신경 쓰지 않았고, 요원들은 무슨 짓이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 상인과 무기, 마약을 거래했던 보위부 요원들을 알고 있었다. 그 요원들은 북한에 있는 당국의 마약 공장과 창고로부터 무기와 마약을 획득하였다. 그 증언자는 중앙의 당국 관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허가 받은 마약 각성제의 밀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한 증언자는 어떤 회사가 한방약의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재료들을 사서 그것들을 한약 생산자에게 팔았다고 말하였다. 1990년대에 그는 정기적으로 교화소에 가서 그곳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샀고, 그것들을 무역회사에 팔았다. 그는 약재 관리를 위한 지방정부의 경제 계획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계획은 특히 아편이 수출을 목적으로 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국영 기업소의 관리자였던 또 다른 증언자는 조선노동당의 중요 인물이 외화 창출을 위해서 그 증언자의 회사에 아편을 재배하고 거래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을 기억하였다.

• 또 다른 전직 관료는 전세계에 있는 북한 대사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이슬람 국가에서의 불법 주류 판매나 국제적으로 금지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중국으로의 상아 밀매 등의 행동에 가담하였다.

5) 개인숭배 심화와 정치조직 찬양

이전 고위 공직자 출신들을 포함한 다수의 증언자들의 증언은 북한 자원의상당 부분이 개인숭배와 김씨 정권 찬양을 고취시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고 증언하였다.

• 1973년에 세워진 금수산 의사당은 이후 어마어마한 김일성의 묘로 변하였다. 그 작업은 대규모 기아가 국가를 황폐화시킨 1995년에 시작하였다. 금수산 태양궁전은 기근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기념비적 건물의 한 예이다. 그것은 20만 명이 모일 수 있는 10,000㎡의 주 광장을 가지고 있는 34,910㎡나 되는 건축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건물을 꾸미기 위해 70만 개의 화강암 조각품들은 20가지 다른 모양으로 조각되었다.고위 공직자 출신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김일성이 1994년에 죽었습니다. 수개월 간의 애도가 있었고, 그의 무덤과 다른 기념물들의 건축을 위해 7억 9천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미 열악한상태에 있는 북한 경제는 바닥을 쳤습니다.”

• 또 다른 전직 관료는 김일성 장수연구소에서 했던 일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상당히  전문성이 있는 연구시설로, 그 목적은 오로지 김일성과 김정일의 장수와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 또한 조사위원회는 평양에서 1989년 7월 1~8일에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사용된 엄청난 지출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누가 봐도 1988년 한국에서 개최한 올림픽에 대한 반응으로 개최된 것이었다.

• 김정일을 보호하기 위해 선임된 조선인민군 경호 조직의 멤버였던 한 증언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정일은 비행기, 배, 기차, 헬리콥터, 차 등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한 대 갖기를 원하였습니다.”

당국 지출의 상당한 부분이 김일성과 그의 후계자의 거대한 동상 및 이들에 대한 개인숭배를 고취시키고 그들의 업적을 진열하기 위해 계획된 여타 다른 프로젝트들에 바쳐지고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절대적으로 우선권이 주어지는데, 이는 그것들이 자주 짧은 기간에 완성된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북한 재정상 최광진은 2012년 북한의 예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경제발전과 주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전체 당국 예산 지출의 44.8%는 김일성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건물을 세우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주체사상에 기반한 현대적이고 자급자족적인 경제의 물질적이며 기술적인 결집으로, 국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작업이었다.

2013년 김정은은 조선인민군에 한국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준비로 세워지고 있는 겨울 스포츠 시설들에 필적하는 세계 최상급의 스키 리조트 건설을 명령하였다. 2013년 5월 그 장소를 방문했을 때, 보고에 따르면, 김정은은 “군인인 건축 노동자들이 총 길이 11만m, 40~120m 폭의 초급, 중급, 고급 코스를 포함하여 수십만 제곱미터 범위에 달하는 스키장을 산에 건설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만족하였다”고 한다.

평양의 문수 워터 파크, 능라 돌고래 수족관, 기쁨 공원 및 원산의 해안 비치 리조트 타운 건설 등 일반적인 국민들의 상황에 즉각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다수의 유사한 고급 프로젝트들이 추진되고 있다.

6) 사치품 구입

북한 당국은 계속해서 국가 자원의 상당한 부분을 사치품 구매와 수입에 할당하고 있으며, 이는 사치품 수입을 금지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가 잘 이행되고 있는지 모니터하기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2009년)의 취지에 따라서 설립된 유엔 전문가 위원회의 보고서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한 보고서에서 전문가 위원회는 이탈리아에 의한 12,000유로(17,290달러)의 가치가 있는 고가의 꼬냑과 위스키, 그리고 130,000유로(187,310달러)의 가치가 있는 1,000명을 수용하는 극장을 위한 장비 같은 사치품들을 압수하였다고 기술하였다. 더 나아가 그 보고서는 북한 당국이 메르세데스-벤츠 12대, 고급의 음악 레코딩 장비, 36대 이상의 피아노와 화장품을 구매하고 수입하려고 시도하였다고 밝혔다.

북한 당국의 사치품 지출은 2012년에 6억 4,580달러(4억 7천만 유로)에 이르렀다. 2013년 10월 보고에 따르면 이 수치는 김정일 치하의 연평균 3억 달러 지출 규모에서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통일연구원 국문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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