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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권

다양한 집단에 대한 영향
중앙배급체계의 실패와 장기간의 대규모 기아 상황은 다수의 북한 주민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조사위원회는 특별히 더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세 집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1) 아동에 대한 영향

2009년 보편적 정례인권검토에 실린 국가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당국은 “국가는 창건 이래로 어린이들은 이 나라의 미래이자 나라의 ‘왕’이라는 원칙적 입장을 변함없이 유지해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아동은 절박한 식량 상황에 의해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집단 중 하나이다. 세계은행(World Bank)의 통계는 1990년에 태어난 신생아 1천 명 중 45명이 영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에 비해 1999년에는 신생아 1천 명 중 58명이 영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2002년 북한은 1993년 영아사망률이 1천 명 신생아 중 27명에서 1999년 영아사망률이 1천 명의 신생아 중 48명으로 증가했다고 발표하였다.

굶주림과 기아는 많은 아동들을 사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아동의 장기적인 발달에도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영양실조는 특히 생애 초기 1,000일(잉태에서 2세까지) 동안의 영아에게, 그리고 유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아동이 성장하고 학습하는 능력에 있어서, 또한 이후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장기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영향을 미친다. 이는 국가와 사회전체의 발전 잠재력을 제한하고 국가로 하여금 보건 유지를 위한 고비용과 인도주의적인 부담을 갖게 한다.

1998년 유엔의 영양실태조사는 9세 이하 아동들의 62%에서 발육장애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수준의 발육장애는 WHO의 등급에 의하면 “매우 높음”으로 간주되고 있다(그림 7). 발육장애에 대한 높은 비율은 기아가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데, 1998년 발육장애로 판정된 9세 아동의 경우 1989년 이래 만성 영양실조를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5세 이하 아동의 증상 범위에 따라 영양실조의 심각성을 표시하는 WHO 등급표

2002년 유엔아동기금(United Nations Childrens’s Fund: UNICEF)과 WFP의 협력으로 북한 당국은 다양한 단계의 샘플링 방법을 이용하여 7세 이하의 아동이 있는 6천 가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자료는 사회인구학적 변수, FP식량 지원, 각 가구에서 가장 어린 아동에 대한 신체 계측조사에 기초하여 수집되었다. 소모성 질환의 발현은 1997년(16.5%)과 2002년(8.2%) 사이에 줄어들었지만, 발육장애의 발현은 변화가 없었다(38.2%, 39.4 %).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심각한 경제난으로 북한 주민, 특히 여성과 아동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북한은 인권이사회에서 2000년대 초부터는 영양가 있는 식품의 공급과 영양 및 의료 서비스의 제공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조사위원회가 수집한 정보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2009년 UNICEF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5세 이하 아동의 중도 및 고도 발육장애 비율이 가장 높은 18개국 가운데 하나였다. 2003년과 2008년 사이에 북한의 5세 이하 아동의 45%가 발육장애를 보였다. 동일 연령 집단에서 9%는 소모성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7%는 극도의 저체중이었다. UNICEF의 후원하에 최근에 실시된 영양실태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2세 어린이 중 27.9%가 발육장애를 보였으며, 같은 연령집단의 8.4%는 심각한 발육장애를 보였다. 따라서 WHO의 분류에 따르면 발육장애율이 여전히 높은 상황이다.

조사위원회가 영양 전문가에게 문의한 바에 따르면 영유아기에 성장 발달이 저해되면 성장하고 난 이후에 회복되거나 보상받을 수 없다. 만성 영양실조는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증가하다가 3세가 되면 정체되지만 2세 이후에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발육장애는 생존과 신체 성장의 측면에서는 물론, 아동의 전반적인 발달에 있어서도 중대한 우려 사항이다. 발육장애로 이어지는 만성 영양실조는 인지적개발, 학업 성취, 그리고 성인이 되었을 때의 경제적 생산성과 여성의 출산에까지장기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발육장애의 세대간 영향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키가 작은 저체중인 여성은 키가 작고 저체중인 아이를 출산할 위험성이 더 높다.

또한 만성 영양실조 아동은 다양한 질병에 더 취약하다. 여러 연구들과 북한이 WHO, UNICEF, 국제적십자사 등 여러 국제기구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2002년 북한의 5세 이하 아동의 60% 이상이 급성 호흡기 질환에 걸렸으며 20% 이상이 설사병을 앓고 있다. 동일 기간 동안 이러한 질병에 의한 사망률은 거의 80%에 달하였다. 의료기관을 방문한 아동의 약 40~50%는 오염된 물로 인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장마철이 되면 그 비율은 60~70%로 급증하였다.

북한의 심각한 식량상황으로 집 없는 아이(소위 ‘꽃제비’)의 숫자가 급증하였다. 이들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거나, 또는 가족들이 먹여 살릴 수 없고 국가로부터 지원도 받지 못해서 시장이나 기차역 대기실에 버려진 아이들이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20조에 따르면, “일시적 혹은 항구적으로 가족환경을 박탈당한 아동은 국가로부터 특별한 보호와 원조를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 2002년 5월에 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한 두 번째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은 부모를 잃은 어린이에게 가족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가족적, 사회적 차원에서 아동의 양육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북한 당국은 대부분의 고아들이 시설로 보내져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사위원회가 들은 바에 따르면, 북한의 고아원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일반’이라고 부르는 보통의 고아원 체계가 있고, ‘계부모’라고 불리는 시설들, 그리고 길거리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호소’가 있다.

1997년에는 당국의 허가 없이 이동하거나 특히 음식을 찾아 다니는 아동들을 엄중 단속하기 위해 각 군에 “9·27 상무”라고 불리는 시설들이 설립되었다. 이는 “길거리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세워진 시설들이 사실상 어린이 보호시설이라기보다는 구금시설에 유사하며, 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런 시설들에 대한 인도주의 기구들의 접근은 차단되었다.
  • 서울 공청회에서 김혁 씨는 자신이 1995년에 아버지에 의해 고아원에 보내졌을 때의 상황을 진술하였다. 그에 따르면 1997년에 “75명의 고아 중에 24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 고아원에 제공되는 식량보조는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먹었던 것은 옥수수를 다 먹고 난 나머지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옥수수 속대를 말린 다음 갈아서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음식을 해서 먹으면 영양가도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변비에 걸렸습니다 … 고아원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1996년과 1997년에 고아원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없어서 최대한 많을 아이들을 내보내려고 하였습니다. 차라리 길가에서 구걸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나을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고아원에 앉아서 굶어 죽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한 증언자는 11살 때 다른 여섯명의 아이들과 함께 간동에 있는 ‘구호소’로 보내졌다. 그녀는 고난의 행군 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들이나 부모가 도망치면서 남겨진 아이들이 그 시설로 보내졌다고 말한다. 그녀는 ‘구호소’에서 그곳에 온지 1년이 된 아이들을 만났다. 처음 시설에 도착했을 때 새로 온 아이들은 의자 위에 세워져 두꺼운 가죽벨트로 구타당하였다. 아이들은 천장 위에 작은 창문들이 달린 지하실로 보내졌다. 그녀는 14~15세 정도 되는 남자 아이 세 명과 12세 여자 아이 한 명과 한 방에 갇혔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고 노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변기를 비우러 갈 때뿐이었다. 아이들은 시설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모래를 먹거나 숟가락을 삼켜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하루 2~3번의 식사는 무 약간과 밀가루 약간이 들어 있는 짠 죽을 조금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늘 배가 고팠다고 회고했다.
‘꽃제비’의 공공 서비스, 특히 보건 서비스 이용실태는 매우 우려할만한 수준이다.
  • 함경북도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한 증언자는 그녀가 근무했던 병원에 기본적인 필수품이 없어서 사망한 많은 ‘꽃제비’들을 보았다. 그녀는 조사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많은 꽃제비들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병원에서 그들을 지원하고 위생상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몸을 감쌀 옷이 없어서 온기를 찾아 석탄공장 옆에서 잠을 잤습니다. 난로에서 사용한 석탄을 꺼내서 부수어 석탄 더미를 만드는데, 아이들은 석탄 더미에 깔리거나 질식하곤 하였습니다.”
2009년 화폐 개혁 이후, 북한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꽃제비’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 북한의 전직 고위 관료에 따르면, 2010년 8월에 김정은은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위해 2010년 9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당대표자회 이전에 평양의 ‘꽃제비’와 노숙자를 소탕할 것을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에 지시하였다. 보위부와 보안부는 지방에 있는 조직까지 불러들여 긴급 소탕 부대를 조직하였다. 잡힌 ‘꽃제비’들은 잘못의 경중에 따라 일반 감옥이나 노동단련대, 혹은 고향의 “갱생 시설”로 보내졌다. 작전 후 보위부와 보안부는 ‘꽃제비’와 미등록 주민의 상당수가 체포되고 고향으로 보내져 상기 시설에 수감되었다고 보고하였다.
2) 여성에 대한 영향

북한은 여성차별철폐협약의 당사국으로, 농촌 지방 거주 여성에 관해서도 특정한 의무를 이행할 책임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808 성 평등(gender equality)을 지향하는 법률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가정과 직장에서 성 평등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식량을 구하고 준비할 책임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었다. 이러한 성 역할은 기근을 겪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1990년대에 경기가 악화됨에 따라 여성의 경제적 부담도 증가하였다. 남성에게는 당국이 지정하는 공장, 기업소에 보고할 철저한 의무가 있었고, 이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공장, 기업소에서 급여나 배급이 줄어들거나 아예 중단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 고용으로부터 배급과 급여의 삭감 및 남성에 대한 제한으로 여성들은 기존에 담당하던 가사 이외에 경제활동도 담당하도록 요구되었다. 동시에 사회보장제도가 붕괴되면서 가사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해 제공되던 메커니즘이 크게 축소되어 여성의 가사 부담이 급증하였다. 예를 들어 보육과 교육시설의 운영 시간이 단축되거나 서비스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렸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식량을 찾는 여성의 역할 자체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경제활동, 가사, 그리고 육체적 노동량이 더욱 증가하였다.

많은 여성들은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스스로 경제활동을 시작하였다. 식량 배급과 노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 가정을 위해 음식을 구하려면 주로 시장(private market)을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북한 당국의 시장 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엄격한 규제가 실시되고 있다. 40세 이상의 여성만이 시장에서 거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 인해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식량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당국에 고용될 수도 없고 시장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된 북한의 젊은 여성에게 성의 상업적 매매만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었고, 성 매매가 증가하게 되었다.

여성이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육체적인 문제들도 있다. 시장에서 거래를 하려면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교통이 통제되기 때문에 여성들이 30~50kg이나 되는 짐을 등에 메고 시장과 시장, 또는 시장에서 집까지 이동하거나, 심지어 물건을 팔기 위해 먼 지역까지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많다. 여성들이 물건을 자전거로 옮기기 시작하자, 당국은 여성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여성이 자전거를 타거나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하였다.

식량난으로 많은 여성들이 북한을 떠나고 있다. 식량을 구하는 것이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2002년 이후 여성들은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식량과 고용 기회를 찾아 떠나는 북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 서울 청문회에서 P씨는 중국에서 네 번이나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경험을 말하였다:
“국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적어도 북한에서 그냥 죽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나는 중국에 가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량난 동안 지하 경제에서 여성의 활동은 북한의 경제적 자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가족 문화로 인해 북한의 여성, 특히 어머니들은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는 그들이 다른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거르거나 식사량을 줄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은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하루 한끼도 못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3) 하급 군인에 대한 영향

북한은 오랫동안 비대한 군대 조직에 적절한 수준의 음식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교들에 대한 식량 제공은 항상 우선 순위에 있었다.

일반 병사들에 대한 식량의 부족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990년대 초에 더욱 가시화되었다. 군대에 배급이 불충분해서 굶어 죽은 병사들에 대한 여러 증언이 있었다.
  • 런던 공청회에서 조선인민군 병사 출신의 최중화 씨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1987년에 나 자신이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군대에 있는 사람들은 왜 음식과 생필품이 제공되지 않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은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 전직 조선인민군 장교에 따르면 1990년대 초부터 군대에서 식량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 애국미 기부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가구 당 10kg의 쌀을 절약해서 국가에 기부하여 군대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병사들의 3~4%가 영양실조였다고 추정하였다.
  • 런던 공청회에서 전직 인민군 대위였던 김주일 씨는 병사들에 대한 식량배급이 삭감되고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병사들에게는 하루 800g의 식량이 배급되었습니다. 김일성 사후에 김정일이 집권하고 나서 배급량은 600g으로 줄었는데, 그 양은 밥 한 공기가 약간 넘는 양이었습니다. 수북하게 한 공기가 아니라 밥그릇보다 약간 높이 올라오는 정도였습니다.”

일반 병사들에 대한 음식의 제공은 앤드류 내치어스(Andrew Natsios)가 말한 “농업의 군사화”로 인해 추가적인 영향을 받았다. 기근이 북한 전역을 휩쓸자 북한 당국은 1997년부터 농가의 일손을 돕고 식량의 비축을 방지하기 위해 군인들을 국영 농장으로 보냈다. 농장원들은 군인들에게 식량을 뇌물로 바쳤다. 따라서 농촌 지역으로 배치되었는지 도시 지역으로 배치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군인들의 식량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군인들에게는 식량 배급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시장 활동에 참가하거나 다른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 런던 공청회에서 최중화 씨는 자신과 같은 병사들은 “스스로를 챙길 수 있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당국만 쳐다보면서 굶어야 했습니다.”고 말하였다.
일반 병사들에게 배당된 배급량은 부패한 고위 장교의 사익을 위해 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  전직 조선인민군 장교였던 김주일 씨는 그가 경험한 부패의 유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부패로 인해 … 일정량이 고위 장교에게 주어질 경우 최하위 병사들이 배급을 받는 차례가 되면 거의 배급할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군대 내의 기아로 인해 민간인의 식량에 대한 권리도 영향을 받았다. 1990년대 초부터 굶주린 병사들이 당국이 제공한 형편없는 배급량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농가나 민간에서 식량을 훔치기 시작하였다. 
  • 김주일 씨는 위원회에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훔치는 일이 일상화되었으며, 장교들은 이러한 행동을 독려하기까지 했다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병사들은 죽지 않기 위해 훔쳐야 했습니다 …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군인들이 명예로운 일을 수행하고 인민을 보호한다고 세뇌 당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 병사들이 식량과 생필품을 일상적으로 훔쳐야 한다는 사실은 군대가 정말로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군대라기보다 해적 집단에 가까웠습니다.”
  • 최중화 씨는 증언에서 식량 부족으로 군인들은 주민에 반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였다고 말하였다. 밤에는 민간에 내려가 식량과 가축을 훔쳤다. 한번은 조선인민군 부대가 밤에 시장에 물건을 팔러 가는 세 명의 민간인 여성을 멈춰 세운 뒤, 군인들은 이들에게 짐을 내려 놓고 옷을 벗고 뒤돌아서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노래가 끝나고 뒤를 돌아 보니 군인들이 물건과 옷을 챙겨서 달아난 뒤였다. 최씨에 따르면 고위 장교들은 상부로부터 식량을 훔친 병사들은 엄하게 벌해야 하고 병사들이 자신의 부대를 이탈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았지만 약탈의 문제는 근절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군 부대를 떠나지 못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병영을 둘러싼 담에 철조망을 설치하겠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굶주린 군인들이 담을 넘어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우리의 입장과 반응이었습니다.”
  • 한 증언자는 함경북도 청진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군대가 민간을 약탈하였다고 증언하였다.
“협동 농장에서 일 년 내내 일해도 군대가 와서 가져가니까 식량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당국은 굶주린 군대를 먹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1996년 12월 연설에서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은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일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적들은 우리의 사회주의도 망할 거라고 헛소리를 하면서 틈만 나면 우리를침입하려고 노리고 있다. 우리에게 군량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미 제국주의자들이 쳐들어 올 것이다.”

"군인들조차도 굶주리고 있다는 걸 알면 서양이 침략해 들어올 것이라고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우려했을 때 이미 “기근은 영양적 위기를 넘어 국가적 안보 문제로 변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군대에 제공되는 식량 배급은 터무니없이 불충분하다. 이 문제는 이시마루 지로 씨가 도쿄 청문회에서 위원회에 보여준 영상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은 최근에 북한에서 비밀리에 촬영된 것으로, 굶어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북한 당국은 여전히 군대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 당국이 일반인들에게 군대에 식량을 기부할 것을 강요함에 따라 민간의 식량상황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 한 증언자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군인들은 배가 고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 2013년 3월에는 함경북도 무산에 있는 27연대에서 식량과 관련된 다툼이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밤에 먹다 남은 밥을 먹다가 걸렸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그를 구타했고, 굶주린 상황에서 이런 식의 취급을 받는 것이 화가 난 그 병사는 총을 빼 들고 여러 병사들을 죽였습니다.”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통일연구원 국문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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