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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권

대응 기제의 범죄화
세계식량계획에 의하면 식량이 부족한 가구는 다음의 4가지 소비 전략을 채택한다고 한다.
  • 첫째, 각 가구는 식단을 바꾼다. 예를 들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대신에 싸고 덜 선호하는 대체식으로 바꾼다.
  • 둘째,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단기 전략을 통해 식량 공급을 늘리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꾸거나 외상거래를 하는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는 구걸을 하거나 야생곡물, 덜익은 곡물, 심지어는 종자까지도 먹는 것이다.
  • 셋째, 그래도 식량이 부족하면 자기들이 먹여야 할 식구를 다른 곳으로 보내서 입을 줄인다(예를 들면, 이웃이 밥을 먹고 있을 때 자기 아이를 그 집에 보내기).
  • 넷째이며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으로, 자기 가족에게 할당된 양으로 지내도록 노력한다(일 인당 식사량이나 끼니 수를 줄이고, 가족 중 특정 성원에게 더 많이 주거나 하루종일 먹지 않고 굶기 등).
식량이 부족한 시기 동안 이런 전략들은 북한 당국에 의해 장려되었다. 여기에는 의학적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생 곡물을 먹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당국은 주민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식량을 찾아 이동한다든지, 교역을 한다든지 기타 유사한 행동 등의 가장 효율적인 대응 기제를 금지하였다.

1) 이동의 자유

보통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사람들은 식량을 찾아 움직인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동의 자유가 철저히 제한되어 있으며, 이는 대량 기근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이 이 선택을 추진할 기회는 사실상 주어지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나라 안을 여행하려면 지방 당국이 발행하는 여행증명서를 필요로 한다. 증명서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체포, 자국으로 송환, 처벌을 받는다. 중앙배급체계가 작동할 때는 양이 부족하나마 배급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자기 거주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중앙배급체계가 붕괴되자 당국은 주민들의 이동을 이전 수준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절박해진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식량을 찾아 나라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국은 기근 동안에 국내 여행 제한을 철폐하지는 않고 여행증 없이 자신의 지역을 떠나는 것을 여전히 금지하였다. 1996년 12월 김정일은 인구 이동의 시작은 나라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한다고 경고하며 정부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동을 즉각 취할 것을 명령하였다. 당국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및 부모가 아사해서 고아가 된 아이들의 이동을 포함한 국내 불법 이동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 구류시설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기근은 또한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필사적으로 중국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을 급증하게 하였다. 많은 북한 주민이 국경 부근 중국에 사는 조선인 친척에게서 도움을 구하였다. 다른 이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식량이나 돈을 위해 중국에서 일을 구하기도 하였다. 당국은 이런 대응 방법들을 촉진하기는 커녕 사람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처벌과 폭력을 사용하였다. 

위원회는 먹을 것을 구하러 중국에 갔다가 송환되어 투옥된 사람들의 증언을 많이 수집하였다.

• 김광일 씨는 중국으로 몰래 넘어가서 송이버섯을 팔았는데, 그것만이 유일하게 살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강제송환되었을 때, 그는 인민보안부에 의해 구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불공정한 재판을 받은 후, 그는 전거리에 있는 제12호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1990년대 후반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국경을 넘는 이동에 형법 처벌을 적용하는 것을 지속하였다. 국경 경비대들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사살할 수 있다는 정책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특히 중국에 있는 동안 한국 국민이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국경을 넘은 죄에 대해서는 2년에서 5년까지의 노동교화형이 부과되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기근의 절정이 지난 2000년, 김정일은 먹을 것을 구하려고 국경을 넘은 사람들의 정상을 참작해주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포고령은 불과 몇 달밖에 실행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기간 중에도 중국에서 강제로 송환된 사람들은 여전히 체포되어 처벌 받았다. 

조사위원회는 북한 당국이 한국에 일시적으로라도 국경을 열어 달라고 요청하여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한국으로 넘어가도록 허락하였다면 친척이나 다른 한국인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방안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는 바이다.

2) 기타 대응 방안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북한 당국은 국내에서 사실상의 시장화를 포함하여 상당한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관리들은 어쩌다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일시적인 비상 수단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입장은 북한 당국이 시장 행동을 제한하고 심지어는 범죄시 하는 것을 설명한다. 정부는 식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시장이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발달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다. 그렇게 되면 국가를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1999년 형법에서 “사회주의경제를 침해한 범죄”에 관한 장에는 8개 조항만 있었다. 2004년 이 장은 “경제 유지에 위반하는 행동”이라고 개명되어 74개 조항을 포함하는 것으로 늘어났다. 형법에는 110조가 추가되어, 불공정한 상업적 행동에 불법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큰 이윤을 얻는 행동을 범법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처벌은 노동단련대에 2년간 수감되는 것이다. 2007년,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 결정사항으로 “추가 조항”들이 삽입되었다. 그것은 불법적 사업 행위 등의 범죄 사항을 신설한다는 결정이었다. 특히 중범죄로 간주되는 보석이나 귀금속의 밀수와
국유 자원의 불법적 매매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북한의 처벌 체계는 북한 주민이 혹심한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채택한 전략에 대한 정부의 반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기근 시기 동안 북한은 ‘노동단련대’라고 하는 구금시설의 방대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노동단련대 및 기타 단기 강제노동 구금시설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다 붙잡힌 사람들과 시장 활동을 한 사람들을 감금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2004년의 형법 개정은 이런 시설들을 정례화하였다. 형법은 ‘노동단련대’에서 2년까지 감금되는 것을 점점 증가하는 경제적·사회적 범죄에 대한 처벌로 수립하였다.

기근과 그 여파에 대한 명령·통제 반응을 보여주는 측면 중 하나는 협동농장과 산업 작업장에서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경찰과 군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1997년 8월, 당국은 식량의 비축과 절도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곡식을 훔치거나 매매하는 일에 관여한 개인에 대한 형벌을 규정하였다. 굶주린 농장원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들 수확의 일부를 빼돌리는 일이 없도록 군대가 농장에 배치되었다. 

당국은 또한 기근 시기 동안 의사소통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그들은 주민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해외의 친척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금지는 아직도 효력이 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주민들은 소위 “브로커”를 통해 해외의 친척을 접촉하거나 중국 국경 인근에서 작동하는 휴대폰을 사용함으로써 금지 조항을 피해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브로커를 통해 사람들은 해외의 친척들로부터 불법적으로 송금을 받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부담이 큰 일로, 붙잡히면 중형을 받게 된다.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통일연구원 국문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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