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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납치·유괴

[시기 및 유형] 1970년대 말: 타국에서의 여성 납치 및 강제실종
1977년부터, 다른 나라의 외국인들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납치는 때때로 강제성을 동원하여 이루어졌고, 다른 경우 외국인들을 북한으로 유인하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납치의 목적으로는 간첩과 군사훈련 학교에서의 외국어 교육, 기술적 전문지식, 그리고 많은 수의 납북자의 경우, 한인과의 인종간 결혼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 체류 외국인들에게 결혼을 위해 “내어주기” 위함이었다. IV장 C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순수혈통 조선인”은 북한 사회의 핵심적 특성이며 혼혈 조선인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78년: 네 명의 레바논 여성의 강제실종

1978년, 네 명의 레바논 여성들이 북한으로 유인되었다. 찰스 젠킨스씨에 따르면, 그들은 네 명의 미군 탈영병의 아내가 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한 달에 천 달러씩 지불받고 도쿄에서 비서 업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통지를 받았다. 이 중 두 명의 여성은 납치 후 일 년하고 한 달 가량 지나 베오그라드를 방문하였을 때 탈출하였다. 나머지 두 명의 여성은 미국 탈영병인 제임스 드레즈노크 씨와 제리파리쉬 씨의 부인으로 “주어졌다”. 북한에 남아 있던 납치피해자의 한 어머니는 이들 여성이 있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였다. 젠킨스씨에 의하면, 이들 중 한 여성은 북한을 떠날 당시 미군 탈영병인 파리쉬 씨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그녀와 그 가족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기자,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였다. 

1978년: 마카오에서의 태국 여성 납치

아노차 판조이(Anocha Panjoy) 씨는 1978년 7월 2일 마카오에서 납치되었다. 북한에서 판조이 씨의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던 젠킨스 씨에 의하면, 판조이씨는 마카오에서 강제로 배에 올라 의지와는 반대로 북한으로 이송되었다고 하였다. 그녀의 실종 3일째 발행된 신문 기사에 따르면, 판조이 씨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였던 한 남자와 소풍을 나갔다고 하였다. 기사에서 인용된 판조이 씨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판조이 씨가 소풍에서 저녁 6시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이는 젠킨스 씨가 북한에 도착한 이후 판조이 씨에게서 직접 듣게 된 정보와 일치한다. 판조이 씨은 미군 탈영병인 압쉬어 씨에게 “주어졌다”.

조사위원회는 2013년 9월 태국 방콕에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판조이 씨의 가족으로부터 증언을 받았다. 태국 정부는 판조이씨의 실종을 납치사건이라고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가 사라진 것은 단순 “실종자” 사건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도 정부는 북한 당국에 반복적으로 판조이 씨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으며, 아직 아무런 회신도 없다고 하였다. 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는 2014년 1월 판조이 씨의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완결시켰다. 조사위원회는 태국 외교부가 판조이 씨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도록 태국정부에 권고하였다.

조사위원회는 판조이 씨가 마카오에 있는 동안 납치되어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할만 증거가 있고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결론에는 찰스 젠킨스 씨의 증언과 판조이 씨도 함께 나온 그의 가족사진 증거물이 결정적이었다.

1978년: 마카오에서 납치된 두 명의 중국 여성

두 명의 중국 여성, 홍링잉(Hong Leing-ieng, 대체 철자: Kong Lingying)씨와 소모이춘(So Moi-chun, 대체 철자: Su Miaozhen) 씨는 아노차 판조이 씨와 동일한 시기에 마카오에서 납치되어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홍씨와 소씨는 마카오의 귀금속점에서 함께 일하였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여성은 귀금속점에서 일본인으로 보이던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요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두 여성에게 너그러웠고, 저녁식사나 다른 종류의 유희를 위해 함께 외출도 하였다.

판조이 씨는 젠킨스 씨에게 자신과 함께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온 두 명의 다른 아시아계 여성들이 었었지만, 말을 걸 수 없게 했었다고 말하였다. 북한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여성은 탈의할 것을 지시받았다. 그들의 옷은 이후 세탁되어 깨끗한 상태로 돌아왔다. 도착 후, 세 여성은 조사위원회에 신분이 알려진 두 명의 고위 지도자들에게 검열을 받기 위해 줄세워졌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각각의 지도자는 중국 여성 한 명씩을 그들의 차로 태워갔다고 한다. 판조이 씨도 이후로는 그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과거 북한 요원이었던 김현희 씨는 홍씨에게서 중국어를 배웠다고 밝혔다. 납북되었던 남한의 여배우 최은희 씨도 북한에서 홍씨과 연락하였던 사실을 보고하였다.

1978년: 싱가폴에서 납치된 네 명의 말레이시아 여성과 한명의 싱가폴 여성

Kidnapped by North Korea: KARKN)에 의하면, 1978년 8월 20일, 네 명의 말레이시아 여성 – 옝 요케(Yeng Yoke, 23세), 시토 타이 팀(Seetoh Tai Thim, 19세), 얍 메 렝(Yap Me Leng, 22세), 그리고 마가렛 옹 구앗 추(Margaret Ong Guat Choo, 19세), 그리고 한명의 싱가포르 여성 다이아나 응 금(Diana Ng Kum)은 싱가포르에서 납치되었다. 일본인이라고 주장한 두 남자는 파티에 보낼 다섯명의 여성을 보트에 태우기 위해 알선소에 의뢰하였다. 19세에서 24세 사이였던 다섯명의 여성은 사라졌고, 보트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최은희 씨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에서 근처에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인들에 대해 들어보았다고 한다.

조사위원회는 북한의 자국민 납치 주장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추적하기 위해 싱가폴 정부와 말레이시아 정부 양쪽에 문의하였다. 싱가폴 정부는 사건자체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알렸으며, 가까운 친척의 영사 지원 요청 또한 전무했다고 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추가적인 정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1979년: 루마니아 여성의 강제실종

도나 붐베아(Dona Bumbea) 씨는 1978년 이탈리아에서 실종되었으며 북한으로 유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붐베아 씨는 이탈리아에서 미술 공부를 하는 중에 그녀에게 미술상이 될 것을 추천한 한 이탈리아 남자를 만났고, 그는 그녀가 홍콩에서 전시회를 열도록 설득하였다. 둘은 홍콩으로 가는 길에 북한을 경유하였고, 도중 이탈리아 남자는 사라졌다. 붐베아 씨는 북한에 억류되었고 미군 탈영병인 드레즈노크 씨에게 “주어”졌다. 붐베아 씨는 북한에서 사망하였으며, 1981년 태어난 리카도 드레즈노크(Ricardo Dresnock) 씨와 1983년 태어난 제임스 가브리엘 드레즈노크(James Gabriel Dresnock) 씨, 두 아들을 남겼다. 둘은 “푸른 눈의 평양 시민” (2006)과 “프로파간다가 영화를 덮쳤을 때” (2013)을 포함한 여러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루마니아에 있는 뭄베아 씨의 가족은 뭄베아 씨의 아들들을 보고 싶어하여도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일체 제한되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2006년 찰슨 젠킨스 씨의 책이 출판됨에 따라 북한에서 붐베아 씨의 생활이 입증되었고, 북한 당국에 붐베아 씨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였다고 조사위원회 측에 밝혔다. 루마니아 당국의 요구에 대해 북한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였다: “현 상황에서 루마니아 국민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어떠한 암시나 증거도 없습니다.”

프랑스 여성

조사위원회는 또한 신원 불명의 프랑스 여성의 납치 관련 정보를 받았다. 최은희 씨에 따르면, 이 프랑스 여성이 프랑스에서 자칭 아시아계 부호 상속인이라고 주장한 한 북한 요원과 낭만적 관계로 엮여 북한으로 유인되었다고 한다. 그 여성은 남자와 함께 평양으로 갔으나, 남자는 그 뒤 사라졌다. 그녀는 북한의 “초대소”(guest house)에 남겨졌다. 또한 김현희 씨도 같은 프랑스 여성을 목격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젠킨스 씨는 두 사람 모두 참여한 영화제작에서 한 프랑스 여성을 본 것을 상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 여성이 납치되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통일연구원 국문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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