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강제납치·유괴

[시기 및 유형] 1950~1953년: 6·25전쟁 당시 한국 민간인 납치
첨부파일
6·25전쟁 당시 북한은 남한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을 그들의 자택 혹은 자택 부근에서 북한으로 강제로 데려갔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에 서명한 1953년 7월 27일까지 자행된 38선 이남에 거주하는 군인이 아닌 일반인의 북한으로의 납치와 이주는 민간인 납치에 해당한다. 이러한 납치 피해자들은 주로 전시납북자라 불린다.

6·25전쟁 당시 붙잡혀 북으로 강제이주된 한국 민간인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약 8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몇 년의 철저한 조사 끝에, 전시납북자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하는 데 전념하고 있는 민간단체인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KWAFU)는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전쟁납북사건 자료원(KWARI)이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총 9만 6,013명의 6·25전쟁 납북자 명단을 작성하였다. 이 명단은 한국 정부와 납북피해자 가족회가 납치 직후 수집한 납북자들의 세부 정보에 기반한 것이다. 이 명단은 피해자 가족 및 목격자들로부터 얻은 자료와 증언에 의해 보완되었다.

이러한 납북은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국이 정책적으로 사전에 계획하고 자행한 것임을 말해준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제출한 96,013명의 명단에 따르면 이러한 납북은 농작, 건설노동 그밖의 기술적인 영역에서 경험이 있는 청년들을 충원함으로써 사회주의국가의 사회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 계획된 작전임을 알 수 있다. 조사위원회에 제공된 아래의 통계는 납북자들의 직업 구성을 보여준다:

6.25전쟁 납북자

납북은 조선노동당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군인들은 조사할 것이 있어 억류될 것이라는 내용을 인지시킨 후 집이나 직장에 있던 민간인들을 데려간 뒤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 서울 공청회 당시 김남주 씨는 충무로에서 전기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납북에 대해 증언하였다. 사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김씨 아버지 가게로 찾아와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나타나자 조선인민군 세 명이 나타나 그의 아버지를 데려갔고, 그 후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북한 요원들이 김씨의 형들을 잡아가려고 집에 다시 찾아왔지만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다음과 같이 조사위원회에 말하였다: “한때는 행복했던 우리 가족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겪은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또한 실용적인 기술과 전문성을 지닌 다수의 청년들 이외에 의료, 법, 공공업무(governance) 분야에서 숙련된 전문가들도 납북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안보, 정보 부서에 종사했던 이들도 납북의 대상이었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 따르면 납북자들 중 공무원 2,919명, 경찰 1,613명, 법조인 및 변호사 190명, 의사 424명이 포함되어 있다. 
  • 납북된 경찰의 아들 최광석 씨가 조사위원회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납북 대상이 될 것이 두려워 자신의 경찰제복이나 경찰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모든 물건을 숨겼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잡혀갔고, 그의 가족은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는 경찰과 비슷한 보안부서에서 일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경찰제복과 관련 서류들을 지하에 숨기라고 하셨습니다 … 제가 지하에서 서류와 제복을 숨기는 동안 아버지를 찾아온 공산당들과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희 아버지에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붙잡아 간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 그러니까 저의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가 제가 아버지 목소리를 들은 마지막이었습니다.”
  • 박명자 씨는 아마 북한 밖에 생존하고 있는 마지막 납북자일 것이다. 6·25전쟁 당시 그녀가 일했던 병원의 의료진 중 절반 가량의 사람들과 함께 납북된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박씨는 북한군이 서울대 병원을 장악하고, 함경남도 함흥에 병원을 짓기 위해 병원 의료진의 절반을 납치한 것에 대해 조사위원회에 증언했다:
“우리는 산간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 의사, 간호사, 원무과 직원들 - 는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다리는 힘이 다 빠졌는데 그들은 지친 사람은 아무나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손을 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고, 처형됐습니다. 우리는 너무 겁에 질려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다리는 풀리고, 그들은 우리를 계속 때리면서 걷게 했습니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조사위원회에 제출한 사료들에 따르면 납북은 우발적 침해가 아닌 북한의 중앙 기관들이 노동과 기술을 충당하기 위한 구체적인 목적하에 자행된 것이다. 북한의 자료에 따르면 특정 기술과 전문성을 갖춘 인력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있었다. 예를 들어 북한이 남한을 급습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6일 국가안전보위부(Ministry of National Protection)가 조선노동당에 보낸 긴급 문서에 의하면 필요한 인력을 범주화하여 엔지니어, 약사,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한국정부의 문서 및 전시에 외국 정부 기관에서 주고 받은 전보에 의하면, 이들 정부가 전시납북에 대한 세부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밀해제된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당시 주북한 러시아 대사가 1950년 8월 17일에 본국으로 보낸 서신에는 서울 시민들을 북한 농장으로 이송시키는 결정을 담고 있는 1950년 7월 17일자 북한 문서가 번역되어 있다. 

전시납북의 근본목적은 노동력과 전문기술 확보와 동시에 남한의 역량에 손상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에서 노동력과 전문기술에 대한 필요는 전쟁으로 인해 북한의 자체적 인구 감소, 광복 직후 북한 당국으로부터 박해 받던 주민들의 이탈로 증가하였다. 광복 후 38선 이북에 북한이 수립된 이후 새로 세워진 사회주의국가는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지주, 지식인 및 종교인들 같이 사회주의국가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 결과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남한으로 이탈하였고, 이에 따라 노동력 부족이 초래되었다. 또한 납북은 남한에 혼돈과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자행되었는데, 이는 숙련된 전문가들과 젊은이들의 부족으로 전후 복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납북을 자발적 망명으로 묘사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꿈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전쟁 발발 전인 1949년 8월 5일자 문서는 “남한의 반공산주의 집단을 북으로 데려와 그들을 분열시키고 파괴한다”는 북한의 정책을 보여준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1950년 6월 24일 이후 휴전선을 넘어간 민간인들이 귀향을 원한다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양측 지휘관들은 이를 허용하고 협조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국제인도법 또한 무력분쟁시 억류된 민간인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무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24일 이전에 남한에서 휴전선을 넘어가 전쟁 종결시까지 북한에 체류하던 민간인 중 남한으로의 송환이 이루어진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의로 북한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전시납북을 지속적으로 부인해 왔다. 예를 들어 2013년 6월 30일, 김정은은 북한 공식 신문인 ‘노동신문’을 통해 다음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6·25전쟁 납북자들은] 현재 꼭두각시 여당 아래 이전보다 훨씬 더 호들갑을 떨고 있다 … 귀순자들의 경우, 그들은 강요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신념과 재통합, 그리고 민족양심에 따라 애국영웅적인 시도를 한 것이다.”

1956년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 전시납북자들의 생사 확인을 “실향사민”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북한 측에 요청하였다. 당시 제출된 7,000명 중 337명에 대한 정보만이 제공되었다. 더 많은 수의 납북자에 대한 정보 요청에 대해서는 “납북”이나 “납북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박을 받았다. 2012년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현재까지 생사확인이 되지 않은 96,013명의 전시납북자의 명단을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제출하면서 이들의 생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직까지 북한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납북 이후 경과된 시간을 감안할 때, 많은 수의 전시납북자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강제적 또는 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에도 진정서가 접수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협조 부진으로 실무그룹 역시 어떤 정보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전시납북자들은 북한에 정착한 이후 극심한 차별을 당하고 제대로 대우받지도 못하였다. 특수 기술과 전문성으로 선택되었음에도 자산보다는 적으로 인식되었다. 당국의 이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은 특히 심각한 처벌을 받고 밀착 감시를 받았다. 대부분이 오지의 광산으로 보내졌다. 많은 이들이 강제노동수용소와 정치범수용소로 사라졌다. 66,000명 가량의 남한 민간인들이 북으로 강제적으로 옮겨진 이후인 1950년 9월 5일, 강원도에 위치한 북한의 내무성은 해당지역 및 시 관할 내무부에 문건을 교부하였는데, 여기에는 완곡어법으로 표기된 “해방된 서울 시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이 문건은 그들을 색출, 심문 및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각 공장과 광산, 그리고 작업장은 그들의 관할 아래 있는 과거 서울 주민에 대한 “채용 노동자” 명단을 작성하고, 정기적으로 그들을 심문하고 “그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모든 행동을 감시하며, 만일 도망할 경우 바로 체포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 조사위원회가 청취한 한 증언에 따르면 훈련된 권투 선수였던 증언자의 삼촌은 신체적 기술 때문에 납북된 뒤 간첩으로 훈련되었다고 하였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자 이 권투 선수의 여형제와 두 명의 남형제들은 북으로 귀순하였다. 권투 선수는 남형제 중 한 명과 함께 살았고, 나머지 남형제와 여형제는 북에서 각자의 가족을 꾸리며 살았다고 한다. 그의 대가족은 평양에서 꽤 잘 살았다고 하는데, 이는 권투 선수의 정보원 내 상관이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을 떠나기 전까지였다고 한다. 이후 권투 선수는 부서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권투 선수와 함께 살던 형제도 처형되었다. 따로 떨어져 가족을 꾸리며 살던 다른 형제는 연좌제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 형제와 그의 가족 모두가 나중에 죽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투 선수의 여형제와 그녀의 딸(증언자)은 오지의 광산 지역으로 보내졌다.
  • 민간인 납북자의 딸이 조사위원회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1977년 또는 1978년에 한국 주민들은 산악지역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그녀의 가족은 도시에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1977년 그들은 한국에서 온 다른 가족들과 함께 외진 산속으로 추방되었다. 그녀는 “추방된 이후 우리는 사람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였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전시납북자들은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갈 자유뿐만 아니라 남한에 있는 가족 또는 정부 관계자들과 소식을 주고받을 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대부분 결혼(남한에서 결혼한 경우 재혼)을 하였고, 가장 낮은 ‘성분’이 됨으로써 몇 대에 걸쳐 그들과 그의 자손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박탈되었다. 여러 증언자들은 조사위원회에 그들의 ‘성분’이 “적대 계층”으로 분류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전시납북자의 딸이었던 한 여성은 그녀의 아버지가 남한출신인 것을 알게된 그녀의 남편이 이혼을 강요하였다고 한다.

한국 민간인 납북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외국 자료를 통해 노동력의 필요성과 한국 국민들을 북한에 재정착시키려는 계획-특히 농장 노동자로-과 납북자들에 대한 북한의 처우를 확인할 수 있다. 조사위원회에 제출된 증언자들의 증언은 대규모 강제 재정착과 특정 전문가들을 겨냥한 것임을 나타낸다.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전시 민간인 납치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지휘 아래 자행되었다는 결론을 더욱 확증한다. 조사위원회는 조선인민군이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당시 전시 상황을 이용하여 민간인들을 북한으로 강제로 데려갔고, 휴전 후 이들 민간인들에게 한국에 돌아갈 기회를 주지 않은 것으로 파악한다.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통일연구원 국문번역본)]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