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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납치·유괴

[시기 및 유형] 1970년대~1980년대: 일본인의 납치
2002년 9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북한 당국과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의심되는 일본 국민의 송환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북한 요원이 13명의 일본인(7명의 여성과 6명의 남성)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많은 일본 국민들이 강제로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의혹이 일본 내에서 수년 간 계속된 이후에서야 인정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발표에 나타났듯이 김정일은 “이는 과거의 북한과 특수관계에 있던 이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는 사과를 전하며 유감을 표시하였다” 김정일과 고이즈미 총리가 자국을 대표하여 발표한 평양 공동 선언에는 “일본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현안과 관련하여, 북한 측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비정상적인 양국 관계하에서 발생한 이 같은 유감스러운 사건들이 추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북한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이러한 인정을 하기 전까지는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되거나 강제실종되었다고 추정되는 이들과의 연관성에 대한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었다.

조사위원회는 납치 임무를 수행하던 부서에서 일했던 전 북한 간부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조선노동당 35호에서 근무했던 한 전 간부는 “납치와 유괴 등의 일반 정보활동”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시인하였다. 35호 내 한 부서에서는 일본 국민의 납치를 전담하여 처리하였다. 이 전 간부는 1990년부터 근무하였고, 당시 사람들을 “데려오라”던 지시는 김정일로부터 내려졌다고 하였다. 지시가 내려오면 실장이 지시를 이행할 계획을 세웠고, 김정일은 이를 결재하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시는 외국인들로 하여금 북한으로 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불가능할 시 납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 땅에서의 국민 납치는 주로 교외, 해안 주변에서 발생하였다. 요원들은 바다를 통해 일본에 접근하여 상륙하였다. 홀로 거니는 여성들이 주로 상대하기 쉬운 표적이 되었다. 전 간부는 피해자를 덮치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가지 방법들을 이야기하였다. 그 중에는 피해자를 에워싸고, 목을 조르거나 자루에 넣어 배로 이송하기 전 입을 틀어막거나 또는 입에 마취약에 적신 붕대를 감는 등의 방법이 포함되었다. 조사위원회에 접수된 또 다른 증언은 납치 수법이 간첩훈련의 정규 구성 요소이며, 간첩들의 50% 가량은 일본어를, 50%는 한국 말씨를 교육받는다고 밝혔다. 35호에서 근무하였던 전 간부는 납치된 일본여성 10명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에 근무한 두 번째 전 간부는 해상에서 일본인을 납치하는데 관여하였다. 전 간부에 의하면 납치작전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결재가 필요하였다. 김정일도 납치 관련 주요 기관인 정찰국에 자주 방문하였다. 해상 납치는 일반적으로 자정부터 새벽 3시 사이에 이루어졌다. 북한 선박을 일본 선박과 유사하게 보이도록 위장하고 (일본어 명문과 함께)일본 해안 가까이에 홀로 떨어져 있는 일본 배에 접근하였다. 배를 공격하고, 가장 어리고 영리한 선원을 납치한 뒤 배는 침몰시키면서 나머지 선원들을 익사시켰다. 북한 간첩들은 기관실 안의 펌프를 분리하여 한두 시간 내에 배에 물이 차서 가라앉도록 하여 일본 선박을 침몰시켰다.

일본인들은 주로 향후 간첩과 테러활동을 위해 납치되었다. 그들은 훈련중인 북한 간첩에게 일본어와 억양, 문화를 가르치고, 완성도 있는 위조를 위한 일본 신원 확인 서류 연구를 하게 하여 북한 요원들로 하여금 납치한 이들의 신분증을 사용해 일본인 행세를 하도록 하였다. 한 예로, 1987년에는 두 명의 북한 요원들이 일본인 여권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와 방콕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대한항공 858기의 짐칸에 폭탄을 설치하였고 안다만 해 상공에서 폭발시켜 승선해 있던 115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이 두 요원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남성 요원은 사망하였으나, 여성 요원이었던 김현희 씨는 생존하였고, 그들은 북한 주민이며 대통령 선거와 1988년 서울올림픽에 혼란을 주고자 김정일로부터 비행기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이후 자백하였다. 타국민 납치에 대한 보고는 납치범들이 그 자신들을 일본인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임이 드러났다.

35호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작전부, 조선인민군 산하 정찰국은 2009년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군에 속하는 “정찰총국”으로 통합되었다.

2002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더 이상 신원미상의 선박이 연루되는 사건은 없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일이 특정군 당국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정한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 더 조사해 보고 다시는 이러한 경우가 재발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하였다”(강조 추가). 조사위원회는 이 납치 사건들이 군의 극성 분자들에 의해 수행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바이다. 대신 이 사건들은 김일성의 분명한 명령에 이어서 김정일에 의해 수행된 표적 공격이었다.

김정일이 시인한 13명의 일본인 납치는 확실히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 정부는 의심의 여지가 있음에도 17명의 일본인(9명의 여성과 8명의 남성)이 납치되었고, 5명이 일본으로 귀환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만족을 표시해 왔다. 일본 경찰은 북한으로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약 860건의 실종 사건을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일본인 납치 및 북한 인권문제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일본 단체간 연합체인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ICNK) 일본팀은 조사위원회에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수는 최소 40명에서 최대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북한의 전면적 협조가 부재한 상황에서 조사위원회는 일본에서 납치되어 북한으로 잡혀간 일본인의 정확한 수를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적어도 100명의 일본인들이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바이다. 납치의 이유는 북한 간첩 및 군사 훈련 학교에서의 외국어 교육, 납북자의 전문 기술, 그리고 많은 경우 북한 내 외국인들에게 결혼 상대로 “내어주기” 위해서라고 추정된다. IV장 C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순수 조선인”의 보호 및 유지관리는 북한 사회의 주요 특징이며, 혼혈 조선 민족의 생산을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일본인은 나중에 일본에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관점에서 북한 내 일본인 인구 증가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른 사회 집단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일본에서의 납치

2002년,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에서 김정일은 13명의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인정 이후, 5명의 일본인들이 자국을 방문하도록 북한의 허가를 받았고, 전원 일본에 남았다. 북한은 납치한 나머지 8명의 일본인은 이후 모두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제공되지 않았다.

요코타 메구미 씨 – 1977년 11월 15일

요코타 메구미 씨는 일본 니가타 현 해안 지역에서 하교길에 납치되었을 당시 13세였다. 2002년, 김정일은 그녀의 납치 사실을 인정하였고, 요코타씨는 이후 29세의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사망신고서는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으며, 유해 유전자검사에서는 양성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메구미씨는 마찬가지로 10대에 북한으로 납치된 남한의 김영남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이며, 둘 사이에는 딸 한명이 있다.

요코타씨의 부모인 요코타 사키 부인과 요코타 시게루 씨는 납치피해자를 위해 활동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운동가이다. 그들은 2013년 8월 도쿄 공청회에서 위원회 앞에 섰다:

“제가 [메구미의] 성장한 모습을 처음 사진으로 봤을 때... 저희는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 처음으로, 저는 사진 속 그녀를 보았으며, 저희는 정말 슬펐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그녀를 찾기 위해 사방을 헤매었고, 지금 그녀는 평양에 있는데, 우리는 정말 낙담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를 찾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녀를 구해낼 수 없고, 그녀에게 미안함을 전했습니다 …아직도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저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타구치 예코 씨 – 1978년 6월

타구치 예코 씨는 두 명의 어린 자식들을 뒤로 한 채 1978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실종되었다. 1987년 11월 대한항공 민항기 폭격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 북한 요원 김현희씨는 타구치씨에 의해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은 타구치씨가 3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나, 당국은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그 어떠한 신뢰성 있는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치무라 (과거 하마모토) 후키에 부인과 치무라 야수시 씨 – 1978년 7월 7일

치무라 부부는 일본 후쿠이 현 오바마 해안 근처에서 사교 모임을 즐기던 와중 납치되었다. 이 부부는 납치에 관한 인정 이후 2002년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5명의 일본인 중 2명이었다. 그들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2004년에는 부부의 자녀들 또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6년, 일본 정부는 그들의 납치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 요원 신광수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다.

하스이케 유키코 (전 오쿠도) 부인과 하스이케 카오루 씨 – 1978년 7월 31일

하스이케 부부는 일본의 니가타 현, 가시와자키 해안에서 납치되었다. 하스이케 부부는 2002년 일본으로 돌아왔던 5명의 납북자들 중 2명이었으며, 자녀들은 2004년에 귀환하였다. 2006년과 2007년, 일본 당국은 부부의 납치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 명의 북한 요원 최선철, 한명일, 그리고 김남진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다.

마스모토 루미코 씨와 이치카와 슈이치 씨 – 1978년 8월 12일

1978년 여름 납치된 것으로 알려진 세번째 부부, 마스모토 씨와 슈이치 씨는 일본 가고시마 현의 푸기아게 해변에서 석양을 보기 위해 떠난 뒤 사라졌다. 북한은 두 사람이 1979년 7월 결혼하였으며, 각각 27세와 2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주장한다. 다른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사망을 증명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마스모토 씨의 형제인 마스모토 테루아키 씨는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회부하였다:
 
“저희 가족은 루미코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걱정을 하였습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는 그녀가 어디에선가 살아있기를 기도해왔습니다. 매우 오랜 기간 슬퍼하였으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어머니와 저의 상처를 헤집고 어제 일어난 일인양 울음을 터트리게 되어, 얼마 가지 않아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웃음은 억지였습니다. 루미코는 언제나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방법 자체를 잊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자매를 잃는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부모님께서 겪으셨을 고통은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소가 히토미 씨와 소가 미요시 부인 – 1978년 8월 12일 

소가 씨와 그녀의 모친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 섬에서 쇼핑하고 귀가하는 길에 납치되었다. 북한은 소가 히토미 씨의 납치는 인정했으나, 어미니인 소가 미요시 부인의 납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소가 히토미 씨는 납치가 인정된 후, 2002년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북한에서 소가 히토미 씨는 6·25전쟁 이후 자발적으로 남한 기지에서 벗어나 북한으로 간 다섯명의 미군 탈영병 중 한 명인 찰스 젠킨스와 결혼하였다. 1965년 남한 기지에서 탈영한 젠킨스 씨는 그보다 앞서 북한으로 간 세 명의 미국인 래리 알랜 압쉬어(Larry Allen Abshier) 씨(1962), 제임스 요셉 드레스노크(James Joseph Dresnock) 씨(1962), 그리고 제리 웨인 파리쉬(Jerry Wayne Parrish) 씨(1963)와 근접한 거리에 거주하였다고 보고한다. 젠킨스 씨에 따르면, 이 네 명은 아주 밀접하게 감시되었으며, 이동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약된 상태에서 관리되었다. 이들은 1966년 러시아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여 북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후, 북한을 떠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음을 확신하였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북한에 갔지만, 스스로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젠킨스 씨와 그 부부의 두 딸은 2004년에 일본에서 소가 씨와 재회할 수 있었다.

납치 당시 아직 19세였던 소가 씨는, 도착 후 첫 일년 간 요코타 메구미씨와 같은 곳에 억류되어 있었다. 밀접하게 감시되고 일본어로 서로 대화하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매우 가까워졌다.

하라 타다키 씨 – 1980년 6월

하라 타다키 씨는 1980년 6월 일본 미야자키 현에서 사라졌다. 북한 요원 신광수 씨는 이후 일본에서 하라 씨의 신분으로 위장하였다. 그는 또한 하라 씨의 여권으로 한국을 포함한 타국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체포되었고 한국에 투옥되었다. 그의 체포 이후, 그는 한국 정부에 하라 씨의 납치와 이송에 가담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북한은 하라 씨가 1986년 간경화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기자로서 일본인 납치에 관한 많은 정보를 폭로해온 이시다카 켄지 씨는 하라 씨의 납치과정에 대해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광수와 협력했던 세 사람은 그의 지시를 따랐으며, 오사카에서 근무하는 하라 타다키라는 요리사를 납치하였고, 규슈에서 다른 북한 간첩과 만나게 하고 그를 가방에 넣어 북한으로 돌아가는 배에 강제로 태워 납북시켰습니다.”

일본 정부는 추가로 네 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주장하며 그들의 석방 및 송환 방법을 모색하였다. 북한 당국은 네 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입국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쿠메 유타카 씨 – 1977년 9월 19일

쿠메 유타카 씨는 일본의 이시카와 현, 우시츠 해안에서 납치되었다. 전직 경비원이었던 우시츠 씨는 북한요원으로 활동하던 한국계 일본인에게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빠졌다. 그 요원은 쿠메씨에게 해안에서 멀리 정박해 있는 배에 고무보트를 타고 돈을 나르는 일을 부탁하였다. 쿠메 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의심스러운 행동 때문에 그 요원을 23일 동안 구금하였으나, 결국 일본을 떠나기 전 쿠메 씨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지 못해 쿠메 씨의 실종에 그가 책임이 있다는 증거를 충분히 수집하지 못하였다. 북한은 쿠메 씨가 북한에 입국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마츠모토 교코 씨 – 1977년 10월 21일

마츠모토 교코 씨는 일본 도토리 현의 한 편직 학교로 향하는 길에 실종되었다. 한 이웃이 그녀가 두 명의 낯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마츠모토 씨의 샌들이 해변가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이는 그녀가 그 낯선 사람들에 의해 배로 납치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중시켰다. 북한과 일본 간의 회담에서, 북한은 마츠모토 교코 씨가 북한에 입국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소가 미요시 부인 – 1978년 8월 12일

소가 미요시 부인은 소가 히토미 씨와 함께 납치되었다(위 참조). 그러나 북한은 소가 부인이 북한에 입국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2) 외국인 납치

공산주의 및 ‘주체’ 사상에 매료된 일본인들의 한 집단은 1970년대 초 자의로 북한으로 갔고, 이후 외국에서의 일본인 납치에 가담하였다.

9명의 일본인으로 구성된 요도호(淀號) 그룹은 1970년 비행기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비행하였다. 일본 적군파(赤軍派)의 소속인 이 그룹은 1969년 일본 공산당의 소규모 급진 좌파 활동가 그룹이었다. 경찰은 당시 일본의 수상 사토 에이사쿠를 납치하려던 분파의 음모를 폭로하였고, 이는 50명이 넘는 회원에 대한 체포와 이 중 9명의 망명 결심으로 이어졌다. 1970년 3월 31일, 정신적 지주인 시모미 다카야 씨와 행동대장인 다미야 타카마로의 지휘하에, 도쿄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 항공(JAL) 351편 여객기를 납치해 승객 129명을 태우고 (후쿠오카와 서울에서 승객을 내린 이후)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납치한 비행기 “요도호”의 명칭에 따라 이 아홉 명은 “요도호 그룹”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쿠바로 향하려고 하였고, 북한에서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북한에 남게 되었다.

요도호 그룹의 부인과 애인들은 이후 북한 방문이 허락되었다. 미혼 회원들은 북한에 있던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룹 회원들과 그 배우자들은 평양 외곽에 목적성을 갖고 건립한 “일본 혁명 마을”에 거주하였다. 공산주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3대의 혁명가들이 필요하다는 김일성의 믿음에 따라 그들의 최우선적 과업 중 하나는 자녀를 낳고 차세대 혁명가들을 육성하여 함께 일본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요도호 회원들과 그 배우자들은 김일성의 지시로 혁명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주체’ 사상과 김일성주의에 관한 광범위한 훈련을 받았다.
  •  ‘주체’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본인 야오 메구미 씨는 1977년 2월, 몇 개월간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북한으로 건너갔다. 일단 도착하자 그녀는 포로로 붙잡혔고, 요도 호 그룹 회원인 시바타 야수히로 씨와 강제결혼을 하여 자녀를 갖게 되었다. 1983년 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이에 그녀는 김일성의 지시와 조선노동당 제56국의 감시하에 어린 일본 여성을 북한으로 유인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지시로 야오 씨는 아리모토 게이코 씨를 런던에서 북한으로 유인하였는데, 이는 일본 혁명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계획의 일부로서 일본인 납치 피해자 이시오카 토루 씨 또는 마츠코 카오루씨와 결혼시켜 자녀를 낳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조선노동당 56국은 자그레브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서 유럽공작을 개시하였다. 자그레브의 부영사였던 김유철 씨는 제56국에서 근무하며 요도호 그룹과 그들 배우자의 활동을 감독하였다. 김 부영사와 요도호 그룹 리더인 다미야는 일본인을 “획득”하고 북한으로 보내 혁명세력에 편입시키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외국에서의 일본인 납치를 계획하였다. 

타나카 미노루 씨 – 1978년 경

미노루 씨는 1978년 유럽으로 망명한 후 실종되었다. 2005년, 일본 정부는 미노루 씨를 납치피해자로 명명하고, 북한에 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시오카 토루 씨와 마츠키 카오루 씨 – 1980년 5월

교우관계인 이시오카 씨와 마츠키 씨는 유럽에서 북한 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요도호 회원들과 결혼한 두 명의 일본 여성 모리 요리코 씨와 와카바야시(과거 쿠로다 씨)에 의해 북한으로 유인되었다. 그들의 납치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두 사람이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신뢰할만한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아리모토 게이코 씨 – 1983년 7월

아리모토 씨는 야오 메구미 씨에 의해 1983년 북한으로 유인되었다. 아리모토 씨는 1983년 7월, 북한에서 시간제 마케팅 직을 가질 것을 설득한 야오양을 만났을 당시, 런던에 있는 어학원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곧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요도호 지도자(북한 체류)의 지도와 우오모토(과거 아베), 키미히로(요도호 회원) 및 북한 요원 김유철(구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주재 북한 부영사)의 감시하에, 야오 씨는 아리모토 씨가 마케팅 회사 매니저(우오모토 씨와 김씨)를 코펜하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네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만난 후, 아리모토 씨는 김씨와 함께 북한으로 이동하였고 다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리모토 씨는 기존 납치되었던 일본 남성들의 아내가 될 젊은 일본 여성이 “필요”하자 북한요원들의 표적이 되었다.

1988년 일본에 있는 이시오카 씨의 부모에게 도착한 편지는 마츠키 씨와 아리모토 씨가 북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폴란드에서 보내온 것으로 보였으며 아리모토 게이코 씨의 보험 서류에 작성되어 있었. 편지에는 그들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쓸 수 없다는 점과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이시오카 씨와 아리모토 씨의 자녀로 보이는 한 아기의 사진이 편지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아리모토 부부는 딸과의 접촉을 위해 수년간 영사지원 요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일간 외교 관계가 부재한 상태에서 일본 정부는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음을 시종일관 알렸다.

2002년 3명의 납치 사실을 인정하면서 북한은 아리모토 씨, 이시오카 씨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녀가 집 안에서 가스 중독으로 모두 사망하였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상황에서 다소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주장된 바와 같은 그들의 죽음을 입증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세부 사항이나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8명의 납북자가 사망하였다는 북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모든 납북자의 가족들을 대표하여 아리모토 씨의 어머니인 아리모토 가요코 부인은 그들이 딸과 다른 모든 납북자에 대한 해답을 찾을 것이라고 도쿄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조사위원회에 말하였다: “우리는 납치피해자를 구하기 위한 활동을 멈출수 없습니다”.

타나카 미노루 씨 – 1978년 6월

2005년, 일본 정부는 타나카 미노루 씨를 유럽에서 북한으로 유인된 납북자로 확인하였다.

과거 일본의 효고 현에서 레스토랑 직원으로 일하였던 타나카 미노루 씨는 1978년 6월 일본에서 유럽으로 떠나던 중 실종되었다. 북일 회담에서, 북한은 타나카 씨의 북한 입국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3) 추가 사례

조사위원회는 더 많은 일본인들이 납치되었다고 믿을만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 조선노동당 35호에서 근무하였던 전 간부는 일본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납치 인원보다 한 명 많은 일본 여성 열 명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었다.
  • 직접적으로 한 일본인 납치에 관여한 야오 씨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납치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녀는 조사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아마도 일본인 수백 명일 것입니다. 모두가[혁명마을의 요도호 구성원과 그 배우자들] 납치를 수행하였고, 오로지 ‘작업’ 혹은 ‘활동’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x라는 사람이 두 건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였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해상에서의 일본인 납치에 관여되어 있던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의 한 전직 관리는 조사위원회에 그의 납치가담 사실과 함께 해상에서의 일본인 납치 및 강제실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1979년 11월, 그 전직 북한 관리는 소수의 선원이 승선해 있는 고립된 선박을 찾아 위장한 배로 일본 연안에 당도하였다. 표적이 된 배에는 여섯 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나이가 어린 선원을 포로로 잡아 북한으로 이송하였고, 나머지 다섯 명은 죽였다.
  • 북한과 관련되었으리라 생각되는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The Investigation Committee on Missing Japanese Probably Related to North Korea: COMJAN )는 일본에서 실종된 470명의 사건을 다루는 한 비정부 조사기관이다. 이 기관의 연구에 따르면, COMJAN은 약 280명의 “가능성 있는” 일본인 납북자가 있을 것으로 보며, 이중 77명은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조사위원회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COMJAN에서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는” 이들은 실제로 납북되었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들에는, 몇 가지 양식을 볼 수 있다. 이 중에는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엔지니어와 인쇄업자)을 납치하는 경우와, 특정 기간에의 실종, 고아였던 성인, 그리고 특정 지역의 여성을 포함한다.
납치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북한에서 목격되었다. 예로, “실종된 인쇄업자” 3명 중 한 명인 히다카 노부오 씨를 닮은 사람을 목격하였다고 한 북한 주민이 신고한 일이 있다. 그는 1967년 도쿄에서 실종되었다. 1966년과 1968년 사이에, 도쿄에서는 세 명의 인쇄기사들이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셋은 각각 일본의 다른 지방에서 왔으며, 도쿄에서 홀로 거주하고 있었고 인쇄회사에서 근무하였다. 그들은 잠재적으로 위조 지폐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쇄 기계류를 다룰 수 있는 지식과 기술로 인해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 납북자로 추정되는 경우들 중 더 눈길을 끄는 사건 중 하나는 후지타 수수무 씨이다. 후지타 씨는 1976년 2월 7일 시간제 부업을 위해 집을 나선 후 실종된 한 대학생이었다. COMJAN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가 북한 요원들에 의해 한 병원에 구금되었으며, 이후 북한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전 북한 주민으로부터 제공된 한 사진 속 인물이 바로 후지타 씨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실종 이전의 후지타 씨의 사진 속 모습과 해당 사진의 모습에는 유사점이 많다고 밝혀졌다. 일본의 조사관들 또한 전 북한 간첩에게서 후지타 씨를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에서 목격하였다는 증언을 받았다. 후지타 씨 사건은 현재 강제적 또는 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에서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북한은 후지타씨와 관련된 사실을 전면부인하고 있다.

조선노동당 56국에 의해 북한으로 이송되어 온 일본인 납북자들은 더 넓은 범위의 요도호 그룹이 살던 일본 혁명 마을 주택군에 거주한다. 35호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된 일본 여성은 평양에 거주하였다. 35호에 의해 납북된 몇몇 일본 여성들은 북한 요원의 아이를 임신하여 몇 군데 위치한 감호 기관인 ‘밀봉 초대소’에 보내졌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요원들 부모의 집으로 보내졌다. 자식의 친모는 주말에만 아이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 여성들은 북한에 있는 한 35호의 감시와 통제하에 놓여져 있다. 이들은 집을 나서거나, 아이들을 방문하거나, 어떤 종류의 활동에라도 참여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통일연구원 국문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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