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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권 침해

1990년대의 기근과 대규모 아사
식량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1993년 식량문제에 의한 봉기가 있었다. 북한은 긴급식량 수송을 위해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외교적 교섭을 시작하였다. 1994년부터는 국가는 특정 주민들에 대하여 점차 가혹해지기 시작하였다. 함경남도, 함경북도, 양강도 및 강원도의 4개 도에서 중앙배급체계가 중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농부들에게 연간 배급량으로 나누어주었던 곡식 중 5kg을 다시 회수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다.

초기에 북한은 국제 원조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대규모 기근에 직면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북한의 태도는 점차 바뀌었다. 1995년 2월, 북한 당국은 국제 NGO로부터 식량 원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1995년 5월,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식량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달 말 북한 당국은 식량 부족을 인정하였다. 북한은 한국과 일본, 미국에 식량지원을 요청하였다.

자연재해가 식량의 가용성을 더욱 악화시켰다. 1995년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폭우로 북한전역이 침수되었다. 1995년 8월 31일, 유엔 인도주의사무국(UN Department of Humanitarian Affairs)은 북한이 처음으로 유엔에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발표하였다. 1996년에는 “기록에 남을 역사상 가장 심한 봄 가뭄”에 이어 역시 대홍수가 있었다.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이런 자연재해의 결과 “농업 부분에 대규모의 심각한 피해”가 있었으며, 1천5백만 톤의 곡물이 유실되었다. 뿐만 아니라 운송 체계도 심각하게 파손되어, 주민들 대다수에게 식량을 제대로 배급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식량난의 주 원인이 홍수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지만 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다른 설명을 한다. 기근은 1995년 홍수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문제가 되고 있었다. 1995년 9월 일본의 외무성 대변인 시마노우치 켄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홍수 이전인 1995년 6월 30일, 일본 정부는 [북한 당국의] 요청에 따라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한에]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총 30만 톤의 쌀을 공급하기로 결정하였다.”

위원회는 이 기간 동안 기근에 시달렸으며 친척과 아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다수의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다. 북한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어떤 이는 풀뿌리로 죽을 끓이기도 했고 어린 소나무 가지의 내피를 끓여 먹기도 하였다. 추수가 끝난 다음에는 벼 뿌리를 캐서 옥수수와 함께 갈아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그런 거친 대체식량을 먹은 사람들은 끊임없는 소화불량과 설사에 시달렸으며, 심한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렀다.

서울 공청회에서 C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저희 부친은 1996년 2월 16일 새벽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습니다… 1997년 4월 저의 언니와 여동생이 굶어 죽었고, 1998년 남동생 역시 죽었습니다.”

• 워싱턴 공청회에서 조진혜 씨는 1990년대 기근 동안 자신과 가족이 경험한 영양실조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녀의 두 남동생과 할머니가 굶어 죽었다.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남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심한 영양실조 상태여서 젖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아기를 죽이지 마세요.” … 제가 이 아기를 돌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기를 업고 동네를 다녔고, 아기가 너무 심하게 울어서 할머니가 업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게 없었으니까 아기는 계속 울었습니다. … 아기는 먹지 못해 결국 내 품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항상 안고 있으니까 내가 엄만줄 알았나봅니다. 물을 먹여주면 어쩌다가 나를 보면서 방긋 웃었습니다.”

• 런던 공청회에서 최중화 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1990년대 군대에서 돌아와 5개월 안에 형이 죽었고, 다음 해에는 동생이 죽었습니다. 셋째 동생도 … 그 뒤에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굶어 죽은 형제를 셋이나 묻고 나니, 최씨는 북한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은 1950년대 전쟁기간에도 살아남았는데, 왜 1990년대에 죽어야 하나? 왜 평화시인데도 죽었을까?”

• 한 여성은 1995년 이후 함경남도의 식량 상황에 대해 말했다. 1995년 2월 아버지가 죽고, 두 여동생이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했다. “큰 동생이 죽어가면서 소원이 국수를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수 한 그릇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 애는 19997년에 죽었습니다. 한 달 후 작은 동생도 죽었습니다. 죽기 전 소원은 빵 한 조각이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동생은 1995년부터 구원 탄광에서 일했는데, 너무 몸이 약해 해고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제가 그 시체를 보았습니다.”

• 서울 공청회에서 P씨는 이웃의 아들 다섯 명이 굶어 죽었으며, 산에서 먹을 것을 찾던 사람들이 독버섯을 먹고 죽기도 하였다고 말하였다.

• 서울 공청회에서 김광일 씨는 “대기근”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합니다. 1990년대, 특히 함경도 지방에서 있었습니다. 기근이 시작된 것은 1994년이었습니다. … 한 동네에서 하루에 80명이 죽기도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관이 모자라, 옛날식으로 시체 나르는 널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묘비를 만들 나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 서울 공청회에서 A씨는 1997년과 1999년 동안이 가장 힘든 “대기근” 시기였으며, 이 기간에는 배급이 중단되었다고 말하였다.

• 지성호 씨는 1996년 3월 왼손과 왼쪽 다리 일부를 잃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너무 배고파 먹을 것이나 식량 살 돈을 찾았다. 움직이는 기차 위에 올라 타 석탄을 훔쳐 팔 생각이었는데, 며칠을 먹지 못해 기차에서 떨어져 치이는 바람에 왼쪽 손과 다리가 잘려나간 것이다. 지씨는 1990년 겨울에는 그와 가족이 먹을 게 전혀 없었다고 말하였다. “나무 껍질도 먹고 땅 속의 배추 뿌리도 먹었지만 그조차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와 몸이 약한 사람들은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초 북한 당국은 그 해 5월까지 식량 배급을 중단한다고 선포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1996년경에는 북한 주민 식단의 30%가 야생식량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1997년 중앙배급체계는 전체 인구의 6%에게만 식량을 공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이 되자 북한 당국은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다. 1998년 1월, 북한 주민들은 당국으로부터 중앙배급체계에 의존할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공식적인 발표를 들었다. 급속도로 악화되어가는 북한의 식량 상황은 1998년 12월 유엔이 발표한 영양실태조사에 반영되어 있는데, 북한 어린이의 16%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이며 62%가 만성영양실조 상태라고 밝혔다. 

한 주민들은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하자 구걸하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는 많은 증언들이 있다.

• 서울 공청회에서 C씨는 함경남도에서 중앙배급체계를 통한 식량 배급은 1994년에 중단됐다고 말하였다.

• 서울 공청회에서 김광일 씨는 함경남도 식량 배급 사정에 대해 말하였다. “1996년 저는 자유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정부가 쌀과 음식을 주니 저는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6년 배급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장사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 1995년 중앙배급체계가 중단되자 한 증언자는 물건을 시장에 내다팔면서 장사를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남편의 학부모들을 찾아가 음식을 얻기도 하였다.

• 다른 증언자는 살아남기 위해 마약이나 국영 기업소로부터 훔친 구리 등 온갖 것을 다 팔았다. 그는 북한 주민이 처한 곤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북한의 법규를 준수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법규를 어기다가 잡히면 체포되어 목숨을 잃습니다.”

• 도쿄 공청회에서 사이토씨는 먹고 살기 위해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철사를 판 이야기를 하였다. 이 불법 사업은 철사를 기차로 눈에 띄지 않게 운반해야 했다. 사이토씨는 옷 안에 철사를 꿰매어 넣어 무겁고 입기 불편했지만 기차 감시원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젊은 여성이 얼마나 절박했었는지에 대해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였다.
“제 앞에는 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아기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아마 뭔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정말 북한 사람들은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참 마음씨가 좋았습니다. 그 아기 업은 여자는 내 앞에 서 있었는데, 아기가 눌리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들 부축하면서 “아기가 눌리지 않도록 조심해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 사이토씨와 그 여성은 기차에서 경찰에게 붙들려 하차하게 되었다. 사이토씨는 자기는 철사를 운반하고 있었기에 경찰에 불려가고 있었지만, 그 젊은 아기 엄마는 왜 불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등에 아기를 업고 손에 아주 작은 가방을 들었는데, 그녀가 왜 끌려가는지 이상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데 경찰이 들어왔습니다. 혼자 들어왔습니다. 저하고 그 아기엄마, 경찰 셋뿐이었어요. 나는 아기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아기 젖을 먹여야 하지 않아요? 시간이 오래 되었는데.” 그녀는 ‘괜찮아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여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이나 타고 오면서 아기가 왜 그렇게 조용했는지 이상했습니다 …나에 대한 심문이 끝난 후 경찰은 그 여자에게 아기를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고, 난 왜 그럴까 했습니다. 그 여자는 아기를 내려놓지 않고 울기만 했고 경찰도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폭넓은 띠로 아기를 둘러 업고 있었는데, 띠를 풀고 아기를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아기는 18개월에서 두 돌쯤 되어 보였습니다. 남자아이였습니다. 아기 배 주변을 빙 돌아가면서 피가 묻어 있어서 경찰이 왜 그런 거냐고 물었습니다. 여자는 계속 울기만 했고 경찰이 아기 몸통을 잡아당기자 약 2Kg 정도 되는 구리 철사가 아기 배 안에서 나왔습니다.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건이죠.”

[출처: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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